1월 2일자로 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외치며 천막농성을 한 지 꼭 500일째를 맞았다. 이들은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며 지난 2012년 8월부터 장기 천막농성을 벌여오고 있다. 장애등급에 따라 복지혜태의 차별을 두는 것은 몸에 등급을 매겨 관리하는 비인간적인 제도이며 부양의무제는 장애인을 돌볼 사회적 의무를 가족의 책임으로 전가해 경제적, 정신적 어려움이 장애인뿐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이어져 상황을 악화시키는 주범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들에게는 추위도, 불편한 천막생활도 큰 어려움이 아니었다. 일상에 쫓긴 듯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장 괴로웠다.
(사진) - 1월 2일 당시 500일째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 -
차별철폐연대 활동가 임영희씨는 "장애등급이 떨어져 복지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불안감에 떨거나 부양의무제로 인해 기초생활 수급권을 박탈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애인들이 많았다."며 "장애인 제도는 당사자에게는 생사가 달린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장애등급이 1, 2등급이 되어야 장애활동지원제 적용 대상이 되어 도우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고로 사망하게 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난 달 2일에는 서울 관악구에서 1급 지체장애인 17세 아들을 둔 아버지가 아들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다. 부양의무제 탓에 아버지가 살아 있는 한 장애인 아들이 직접적인 기초수급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들의 얘기를 듣지 않고 그냥 지나친 것 같지만 500일이라는 시간이 흐르다보니 사람들이 조금씩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듯하다. 임씨는 "처음에는 100일을 예상하고 농성을 시작했는데 벌써 500일을 맞았다"며 갈 길이 멀지만 그동안의 성과라면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문제를 공론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전했다.
농성 500일을 맞아 차별철폐연대는 조촐한 기념행사를 준비하기도 했다. 오후 1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었고 오후 6시 농성장에서 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멤버 김용민씨를 초청해 강연을 들었다.
차별철폐연대 등 12개 단체가 모인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 은 기자회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공약으로 장애등급제 폐지를 약속했지만, 오히려 이를 유지, 강화하고 있다"며 "농성투쟁 500일과 새해를 맞아 더 투쟁해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를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장애인등급제와 부양의무제란 무엇일까>
장애인등급제는 말 그대로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갖고 있는 불편함의 수준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차등적으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도이다. 가령 장애인연금의 경우 장애인등급을 적용하여 등급에 따라 제한적으로 연금을 지급한다. 장애수당과 활동보조인 서비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는 철저히 '의료적 관점'에만 치중된 장애 분류로 장애 정도나 사회경제적 환경 등 다면적 요인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간의 몸에 대한 등급(1~6등급)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장애인은 곧 수혜대상자라는 인식을 고착시키며 차등적 복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반인권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문제점도 있다.
(사진) - 13년 초 정부에서 발표했던 장애인 등급제 개편안 -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 5월 28일 정홍원 국무총리 주재로 박근혜 정부 첫 '장애인정책 조정위원회'를 개최하고 장애인정책 국정과제 추진계획과 장애인정책 2013년도 추진계획을 논의했으며 이 자리에서 보건복지부는 국정과제 세부추진계획을 통해 장애인 권리보장 강화, 중증장애인 보호, 발달장애인법 제정, 장애인연금 급여인상 및 대상 확대, 공공의료 강화 방안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1단계로 2014년까지 2~3개로 등급을 단순화한 후, 2단계로 2017년까지 등급제를 폐지한다는 복안이며 장애유형 중 가장 취약한 발달 장애인에 대한 지원 확대 및 권리보호 강화를 위한 '발달장애인법'도 2013년 안에 제정될 수 있도록 추진한다고 밝혔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후보 시절 장애인등급제 폐지 공약과 위와 같은 5월의 장애인정책 국정과제 논의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시정안이 제대로 나오지 않자 차별철폐연대는 농성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부양의무제 역시 많은 잡음을 발생시키고 있다. 부양의무제란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빈곤층이라도 직계 부양의무자가 일정 부분 소득이 있거나 일정 기준 이상의 재산이 있으면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없도록 한 조항이다. 즉, 가족에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 시에 수급이 줄어들거나 수급이 끊기게 된다. 이것의 가장 큰 문제는 비취업자 역시 노동가능 인구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수급이 끊어진 장애가족은 비장애인인 자녀가 있음에 따라, 수급을 받지 못하게 되어 생활이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또한, 자녀들의 자유가 보장이 되지 않고 부모의 생명권도 위협받는다는 문제점도 있다.
현재 기초생활수급자 85만 가구 중 장애인은 17만 4000가구인데, 부양의무제로 인해 수급 자격을 박탈당한 장애인이 상당수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허선 순천향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부양의무제는 현실적으로 가난한 부양의무자에게 또 다른 부담을 넘기는 꼴"이라며 "최저 생계만큼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보장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두 제도 모두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는 제도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폐지라는 카드를 들고 나오기에 앞서 실현 가능성을 고려해보면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부양의무제의 경우 국회에는 부양의무제를 없애는 내용의 법률 개정안이 상정되어 있지만, 논의는 좀처럼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가 5조 7000억 원의 복지 예산이 더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며 제도 폐지에 난색을 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 폐지를 외치는 목소리에 더하여 복지부 이영찬 차관은 "폐지하면 연간 7조 원의 재원이 필요하다. 이를 감당하기 힘들기에 단계적 완화를 추진해왔다."라며 "기초법을 개편하면서 부양의무자가 수급자를 부양하고도 중위소득 수준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완화했다. 따라서 내년도에 12만 명 정도가 추가 보호된다."라고 답하였다. 즉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급작스러운 폐지보다는 점차적인 폐지로 가는 길목을 터놓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한 "부양의무자가 부양해야 한다는 국민 관념도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며 현재로서는 폐지되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했었다. 이전부터 제기되어온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장애인 노인과 보호가 더 필요한 계층에 대해서 소득 기준을 완화해 적용하기로 한 것이 13년도의 절충안이었으나 그나마도 장애인들과 기초생활수급자들에게는 만족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장애인등급제와 부양의무제를 두고 양 측 모두 양보할 수 없는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가운데, 장애인등급제 만큼은 정부가 한 발 물러나 조속히 해결해야 할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박근혜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약이기도 했거니와 지난 5월 발표한 성명에서도 언급했던 사안이라는 점에서 장애인등급제는 한 사람의 약속 이행의 관점에서도 반드시 폐지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장애인등급제 폐지로 인한 비용이 부양의무제만큼 국가의 입장에서 큰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닌데다가 17년까지 순차적인 폐지안을 언급하기도 했었던 만큼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라는 점에서도 그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을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은 분명 국가의 의무이다. 현재 국가가 장애인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부족한 면이 많은 건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결코 공평할 수는 없더라도 '공정'해야 한다. 공정한 접근과 의무 이행을 위해 정부의 입장에서 신속하고 현명한 해결책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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